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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탄서원-충절사(忠節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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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04-29 16:03 조회2,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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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절사 [忠節祠] - 명탄서원
이명성과 이명덕(1373∼1444) 형제의 학행을 기념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이명성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고려 유신인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이명덕은 고려말∼조선초 문신으로 호는 사봉이다. 예문춘추관, 좌부대언 등을 지냈고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 병조참판 등 많은 벼슬을 지냈다.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원래는 성종 때 충남 연기군 명탄에 세웠던 충절사라는 사당인데, 명탄서원이라고도 불렸다. 선조 18년(1585)에 서원 이름을 하사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진 것을 철종 2년(1851)에 공주의 유생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 새로 지은 것이다. 고종 5년(1868)에는 잠시 철폐되기도 하였다. 1956년 사우 충절사를 다시 지었는데, 이곳에는 선생 2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85년에 묘정비와 강당, 고직사 건물을 지었다.
 
■ 충남문화재자료
    ○ 지정번호 : 충남문화재자료 제70호  
    ○ 지정연도 : 1984년 5월 17일  
    ○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월송동 239   
    ○ 시   대 : 조선시대  
    ○ 크   기 : 사당 정면 3칸 측면 3칸, 솟을삼문 정면 3칸  
    ○ 분   류 : 사묘재실
 
■ 내용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月松洞)에 있다. 1859년에 간행된 《공산지(公山誌)》에 따르면, 1490년(성종 21)에 창건되었으며, 1585년(선조 18)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서원이 처음 건립된 곳은 명탄(鳴灘:현재의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이므로 명탄서원이라고도 부른다.
1967년에 간행된 《명탄서원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후손들이 유허지에 모옥(茅屋) 1칸을 짓고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1851년(철종 2)에 이학수(李鶴秀)와 조재응(趙在膺), 안광직(安光直:1775~?) 등이 건의하고 유림들의 발의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55년 공주향교의 유림, 이명성의 후손 이찬(李燦) 및 이명덕의 후손 이태희(李泰熙) 등이 경비를 모아 1956년에 현재의 사당과 삼문을 재건하였다. 1957년에 강당을 가건물로 건립하였으며, 1959년에 이명성과 이명덕의 위판을 봉안하였으며, 1998년에 이명성의 18세손 이종인이 충청남도와 공주시 및 유림들의 후원으로 현재의 강당을 중건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익공집 양식으로, 삼문과 담장으로 구성되며, 삼문의 오른쪽에는 묘정비, 강당, 고직사가 있다. 충절사 전면 1칸은 툇간이며, 정면은 개방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동자기둥과 대공을 써서 처마도리·종도리·마룻대의 5개의 도리가 얹혀진 지붕틀을 꾸민 집)이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주춧돌은 앞뒤 모두 위를 둥글게 처리한 원추형을,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머리에는 기둥에 비해 약한 창방(昌枋:대청 위 장혀 밑에 대는 넓적한 도리)을 끼웠고, 기둥머리를 놓은 다음 장여와 굴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각칸의 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소로 4개씩을 끼웠으며, 창방뺄목은 장여뺄목과 같은 길이로 끝부분에 소로 1개를 끼웠다.
사당 앞에는 솟을삼문이 있는데, 정면 3칸으로,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두지 않았으며, 장여와 납도리를 끼웠다.
■ 이미지 자료
 
■ 명탄서원
출처 : 디지털공주문화대전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 사송정에 있는 여말선초 학자 이명성과 이명덕의 학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서원.
   ○ 개설
       이명성(李明誠)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고려 유신
     인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이명덕(李明德)은 여말선초 문신으로 예문춘추관, 좌부대언 등을 지냈고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후에 우의정으로 추
     증되었다. 1992년 대전시 중구청에서는 이명덕이 지금의 대전시 중구 정생동에 살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옛 공주 땅인 정생동에 유허비를 세워 이명덕의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 위치 : 충절사는 공주시 월송동 사송정 뒷편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위치한다.
   ○ 변천
       충절사는 1490년(성종 21) 건립되었으며 1585년(선조 18) 서원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이 처음 건립된 곳이 현재의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지명이 명탄(鳴
     灘)이었기 때문에 명탄서원이라고도 하였다. 1967년 간행된 명탄서원지(鳴灘書院誌)』에 의하면 명탄서
     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유허지에서 후손이 초가집 1칸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
     였다.
         그 후 200여 년이 지난 1851년(철종 2)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
     로 훼철되기도 하였으나 1955년 공주향교 유림들이 전국의 향교와 유림들에게 통문을 돌리고,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이듬해인 1956년 현재의 사우와 삼문을 재건하였다. 1957년 강당을 건립하였으며 1959년 이
     명성과 이명덕의 위패을 봉안하였다. 1998년에는 이명성의 18세손인 이종인(李種仁)이 충청남도와 공주
     시, 공주향교 등 여러 유림과 후손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강당을 중건하였다.
   ○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양식으로 삼문과 담장으로 되어 있다. 삼문의 전면 오른쪽에는 묘정
       비와 강당 및 고직사가 우측에 붙어 있고,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충절사의 전면 1열은 툇간이며 정면을
       개방했다. 측면 벽은 심벽으로 막고 바닥은 흙바닥으로 마감했으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기단은 위를 둥글게 가공한 원추형을 사용하였고, 전면 3곳에 계단을 설치해 두었으며 각 칸의 창방과 장
       여 사이에는 각각 4개씩의 소로를 끼워 두었다. 사우 앞에는 정면 3칸의 솟을삼문이 겹처마 맞배지붕으
      로 되어 있고, 전면에 높은 축대를 쌓고 문 정면 한 곳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 현황
       1984년 5월 17일 공주시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충절사의 뒤편에는 시조 諱 天一 로부터39세
       까지의 선조를 모신 모선단이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5일 에 전국종친들이 모여 춘향제를  지낸다.
   ○ 의의와 평가
       충절사는 본관을 공주로 하는 대표적인 공주 지역의 성씨인 공산이씨 가문의 유적이다. 공산이씨들이 주
       변의 여러 향교에 등재되는 상황이라든지,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공산이
       씨들은 이 지역에 넓게 퍼진 향촌 생활의 중심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서 공주에 충절
       사를 다시 세운 것을 보면 이 시기 다시 공주에서 공산이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을확인할수있다.
[참고문헌]
?  『공주문화유적』(공주시·공주대학교 박물관, 1995)
?  『문화유적분포지도』(충청남도·공주대학교 박물관, 1998)
?  『충남의 서원·사우』(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1999)
?  『공주 충·효·열 유적』(공주문화원, 2000)
?  『공주시지』(공주시지편찬위원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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